작은 이야기 속에서 평온이 자라납니다.
자안 성운 대종사의 꽁보리밥
지원 스님 (육지장사 회주) / - 법보신문 (2026년 4월 8일)
행자 시절 보리쌀 3번 삶아 공양 준비
6시간 불리고 ‘3탕’ 거쳐야만
껍질 터져 씹을 수 있는 밥 돼
공양간서 세운 보현행원 원력
아미타 요양병원 보시로 귀결
자안 성운 스님의 명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국대 석좌교수로서 쌓은 학문의 깊이와 삼천사 인덕원을 일궈낸 실천력은, 내면의 법화 철학과 보현보살의 화엄 실천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결과물이다. 겨울 동토를 뚫고 솟아오르는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역경에도 물러섬 없는 불퇴전의 정신이 그 뿌리에 흐르고 있다. 그 원력은 최근 조계종의 오랜 숙원이던 승려복지 요양병원의 완성으로 활짝 열매를 맺었다. 스님은 200병상 규모의 의료법인 인덕원 아미타 요양병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종단에 흔쾌히 보시했다. 이는 한국불교 복지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아득한 60여 년 전인 1960년대, 성운 스님이 행자 시절 공양간 소임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을 지어야 했다. 전날 밤부터 6시간 동안 물에 불린 보리를 솥에 삶아 건져내기를 세 번 반복해야 비로소 보리알이 터지며 밥의 형상을 갖추었다. 이 세 번 삶기, ‘3탕(三湯)’의 여정은 거친 중생의 업장을 녹여 부처의 성품으로 바꾸는 수행과 꼭 닮아 있다. 배고픈 민초들과 나누었던 그 밥 한 그릇은 성운 스님에게 온몸으로 중생의 고통을 느끼는 소중한 수행이 되었다.
성운 스님의 꽁보리밥은 ‘화엄경’의 아홉 곳 법회 장소를 거치며 완성되는 장엄한 수행 드라마다. 보리 싹처럼 모두를 먹여 살리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보리수 아래의 발심으로부터, 보리쌀을 씻으며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자 부처라는 믿음을 다지고, 아궁이 불을 지피며 내 마음이 참된 중생 구제의 열정인지 살피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의 온기를 민초들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다짐하는 나눔으로 이어진다. 솥뚜껑을 열 때 터져 나오는 하얀 김 속에서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저잣거리에서 직접 밥을 퍼주며 중생과 고락을 함께하고, 마침내 바리때에 보리밥을 담은 선재동자가 되어 끝없는 구도행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아홉 단계의 여정은 공양간의 일상이 곧 화엄 39품의 정수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화엄경’은 이를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일컫는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린 거대한 인다라망의 그물코마다 박힌 수많은 보석이 서로를 끝없이 반사하며 빛나듯, 내가 빛나면 상대가 빛나고 네가 존재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가장 비천해 보이는 것 안에서 가장 고귀한 진리가 빛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에서, 남들이 찌꺼기라고 외면했던 꽁보리밥 한 그릇조차 수행자의 기운을 북돋는 보약이자 우주를 장엄하는 꽃이 된다.
“허공이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할지라도 나의 행원은 끝이 없다”는 성운 스님의 사자후는 이제 거대한 복지타운이 되어 외로운 중생을 품는 아미타 정토로 화현했다. 나를 낮추는 하심과 독소를 비워내는 정화, 차별 없이 나누는 평등. 딱딱한 보리알이 부드러운 밥이 되듯, 수행자 역시 거친 마음을 자비의 몸으로 바꾸는 인고를 견뎌야 한다. 그래서 60년 전 공양간의 꽁보리밥 한 그릇에 담긴 이 진리가 바로 이 시대에 만개한 화엄의 꽃이다.
보리에는 수용성 식이섬유 베타글루칸(β-glucan)이 쌀보다 50배 이상 함유되어 있다. 이 성분이 식후 혈당 상승을 억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당뇨·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현대 과학을 통하여 입증됐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보리가 고통받는 이들의 현대병을 고치는 약이 되듯, 스님의 복지 원력 역시 사회의 병든 자리를 치유하는 처방전이 되었다.
